나에게는 아주 중요하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 하나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 두가지 질문은 '지금 여기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하는 선행질문들이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순간이 고통인 것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이 더 많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된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삶은 고통이었다. 남들 보다 특별히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나마 십대와 이십대 때는 몸이라도 건강했는데, 지금은 노화가 시작돼서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신경 써서 관리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낙도 사라졌다. 소화기능이 안좋아지니 음식도 맛없고 몸에 좋은 것들만 먹어야 한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생활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남이 시킨 일을 남이 정해준 시간까지 끝내는 것"
이런 일이 즐거울리 없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극소수만 예외일 뿐,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퇴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살지 않는게 사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었고, 삶을 지속할 동력을 얻기 위해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왜 살아야 할까? 삶은 뭘까? 왜 마음대로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못하는 걸까?
이 모든게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면 된다. 왜 사냐는 의문을 품을 가치가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그 존재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존재를 만나고 싶었다. 나를 만든 존재, 이 세상을 만든 존재를 말이다.
이 세상을 만든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선한 존재, 악한 존재,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
세상을 만든 존재를 만나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나를 왜 만드셨나요? 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요즘 내가 듣는 답변은 이것이다. 실제 그 존재를 만나 답을 들은 것은 아니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답변이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답변은 내가 처한 환경과 정신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나보다. 답변은 이렇다.
"너희들은 나를 위해 만든 존재다. 특별한 목적은 없어. 그냥 만들고 싶어서 만든거야. 동물원 원숭이를 생각해보렴. 동물원 원숭이가 자신을 가둔 인간들에게 이렇게 묻는거야. 우릴 왜 우리 안에 가둔거죠? 이 안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죠?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워요. 자유도 없고, 무료하고,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이야. 너희는 뭐라고 대답하겠니? 원숭아 넌 그냥 우리의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거기 갇힌거야. 뭘 하든 그건 니 자유고. 주는 대로 먹고 놀러온 사람들 구경거리만 되어 주면 돼. 라고 대답하지 않겠니?"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신은 이렇지 않을거다. 아니 이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이 저런 존재라면, 인간에게 있는 사랑, 정의, 우정, 따듯한 마음 등은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는건 신이 인간에게 사랑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는 아니고, 선보다 악에 쉽게 굴복하지만 적어도 선한 것이 더 좋다는 것은 안다.
글을 쓰다 보니 우리에게 선한 마음이 있지만 왜 세상은 이지경일까를 고민하는게 더 나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계속 부정정인 방향으로 생각을 지속해가면 내가 어떻게 되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발을 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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